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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가위손 (탄생, 사랑, 배제)

by lhs2771 2025. 12. 27.

가위손 영화 속 한 장면

 

가위손, 다정함을 배웠지만 다정하게 살 수는 없었던 존재의 이야기

가위손은 팀 버튼 특유의 동화적 이미지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 사회가 타자를 어떻게 소비하고 배제하는지에 대한 냉정한 통찰이 담겨 있다. 이 영화는 괴물의 탄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순수한 존재가 사회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 순수가 어떻게 오해되고 왜곡되며 끝내 폭력의 대상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가위손〉은 사랑을 다룬 영화이지만, 동시에 사랑이 허용되는 조건과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슬픈 결말 때문이 아니라, 그 슬픔이 개인의 비극이 아닌 사회의 구조에서 비롯되었음을 끝까지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탄생

가위손은 처음부터 완성되지 않은 채 세상에 등장한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지녔지만, 인간의 손을 갖지 못한 존재다. 이 불완전함은 단순한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규정하는 조건이다.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딘가 부족한 존재’로 정의된다.

그를 만든 발명가는 가위손에게 사랑과 감정을 주었지만, 마지막 한 조각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이 설정은 중요하다. 가위손은 창조자의 사랑 속에서 태어났지만, 그 사랑은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채 중단된다. 그는 처음부터 상실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성 위에 홀로 남겨진 가위손의 모습은 보호와 고립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세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내려다본다. 그러나 그 거리만큼이나 그는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가위손〉은 이 공간적 설정을 통해 말한다. 사회는 언제나 중심과 주변을 나누고, 어떤 존재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주변으로 밀려난다는 사실을.

가위손의 가장 큰 특징은 폭력성이 아니라 조심스러움이다. 그는 자신의 손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늘 움츠리고, 망설이며, 자신을 최소화한다.

이 조심스러움은 역설적으로 그의 외로움을 더 깊게 만든다. 그는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갈수록 상대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공포 속에 살아간다. 이 모순은 그를 끝없이 고립시킨다.

영화는 처음부터 분명히 한다. 가위손의 비극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 조건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그는 잘못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다르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사랑

가위손이 마을로 내려오는 순간, 영화의 색감은 극적으로 변한다. 파스텔톤의 집들과 정돈된 거리, 반복되는 일상은 안전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이 공간은 동시에 극도로 획일적이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가위손을 환영한다. 그의 외모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그의 능력은 재능으로 소비된다. 그는 머리를 자르고, 정원을 가꾸며, 이 사회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된다.

이 환영은 조건부다. 가위손이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다름이 이 사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기능으로 소비된다.

킴과의 만남은 이 조건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가위손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목적 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게 된다. 이 사랑은 욕망보다 조심스러움에서 출발한다.

가위손은 킴을 만질 수 없다. 손을 잡을 수도, 안을 수도 없다. 이 불가능성은 그들의 사랑을 더 순수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비극적으로 만든다.

〈가위손〉은 여기서 묻는다. 사랑이란 반드시 소유와 접촉을 전제로 해야 하는가. 닿을 수 없어도 지키고 싶은 마음 역시 사랑일 수 있는가.

가위손의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 그는 킴을 원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안전하길 바란다. 그래서 그는 점점 뒤로 물러난다.

이 선택은 숭고하지만, 동시에 너무 가혹하다. 그는 사랑을 배웠지만, 사랑을 살아갈 수는 없다.

영화는 사랑조차도 사회적 규범과 안전의 기준 안에서만 허용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가위손의 사랑은 너무 다르기에,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된다.

 

배제

마을의 태도는 서서히 변한다. 작은 오해가 쌓이고, 불안이 증폭되며, 가위손은 점점 위험한 존재로 규정된다.

이 변화는 갑작스럽지 않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언어와 시선 속에서 진행된다. 호기심은 의심으로, 의심은 공포로, 공포는 폭력으로 변한다.

〈가위손〉이 가장 섬뜩한 이유는, 이 폭력이 특별한 악인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얼굴로, 평범한 방식으로 가위손을 밀어낸다.

그는 더 이상 ‘신기한 이웃’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문제’가 된다. 사회는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통제하려 한다.

가위손이 다시 성으로 돌아가는 선택은 도망이 아니다. 그것은 자각이다. 그는 이 사회가 자신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킴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 그는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한다. 이 선택은 희생이자 체념이다.

눈이 내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가위손은 여전히 조각을 만들고 있다. 그 조각에서 떨어지는 얼음이 눈이 되어 마을에 내린다. 그는 여전히 세상과 연결되어 있지만, 직접 닿지는 않는다.

이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러나 완전한 절망도 아니다. 그것은 ‘함께 살 수 없음’을 받아들인 상태다.

〈가위손〉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세상은 다름을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다름이 안전할 때만 허용한다고. 그리고 어떤 사랑은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지켜보는 형태로 존재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