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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더 차일드 (무지, 충돌, 책임)

by lhs2771 2026. 1. 5.

더 차일드 영화 포스터

 

더 차일드, 책임을 배우지 못한 인간이 처음으로 인간이 되는 순간

더 차일드는 아이를 사고파는 충격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이 영화의 진짜 관심사는 범죄가 아니라 ‘책임의 발생 조건’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 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도덕의 언어로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그 선택이 가능해진 삶의 구조를 끝까지 추적한다. 브루노는 비윤리적인 인물이지만, 전형적인 악인은 아니다. 그는 잔인해서 아이를 판 것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개념 자체를 삶 속에서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인간이다. 〈더 차일드〉는 이 무지를 변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무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묻는다. 인간은 언제부터 타인의 삶을 자신의 선택 안에 포함시키는 존재가 되는가. 그리고 그 책임은 사랑보다 먼저 가능한 것인가. 다르덴 형제는 부성애를 감동의 서사로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책임을 깨닫는 과정이 얼마나 늦고, 고통스럽고, 되돌릴 수 없는 선택 위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냉정하게 기록한다.

무지

〈더 차일드〉의 주인공 브루노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모른다. 그는 미래를 계획하지 않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생존과 이익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브루노에게 세상은 연속된 오늘들의 집합일 뿐이다. 내일은 상상되지 않고, 결과는 계산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선택은 언제나 즉각적이다.

이 영화에서 브루노는 가난하지만, 가난을 비관하지 않는다. 그는 결핍을 문제로 인식하지도 않는다. 결핍은 그의 삶의 기본값이다.

이 기본값 속에서 아이는 생명이기 이전에 ‘자원’으로 인식된다. 브루노는 아이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아이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더 차일드〉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브루노의 행동이 잔혹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에는 책임을 요구하는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도, 공동체도, 안정적인 노동도 없다.

이 영화는 빈곤을 감정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빈곤이 인간의 시간 감각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삶에서, 책임은 사치가 된다. 브루노의 선택은 비도덕적이지만, 그의 사고 구조 안에서는 논리적이다.

〈더 차일드〉는 이 논리를 폭로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이런 논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가.

브루노는 아이를 팔고도 즉각적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죄책감은 책임을 배운 인간에게만 가능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 무지를 끝까지 숨기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충돌

브루노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은 도덕적 깨달음이 아니라, 현실과의 충돌에서 발생한다.

소니아의 붕괴는 브루노에게 처음으로 감정적 타격을 준다. 그녀의 절망은 설명이나 설득이 아니다. 그것은 결과다.

이 영화에서 각성은 언제나 외부에서 온다. 브루노는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다. 그는 반성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대신 그는 잃는다. 관계를 잃고, 신뢰를 잃고, 이전의 ‘편안한 무지’를 잃는다.

아이를 되찾으려는 시도는 속죄가 아니다. 그것은 공포에 가깝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이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이 과정에서 브루노는 계속 실패한다. 그는 서툴고, 충동적이며, 여전히 계산하지 않는다.

〈더 차일드〉는 이 실패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책임은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감동을 제공하지 않는다. 브루노의 변화는 아름답지 않고, 느리며, 고통스럽다.

다르덴 형제는 의도적으로 음악을 배제하고, 카메라를 밀착시킨다. 감정의 과잉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다.

브루노는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은 구원의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표현이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이 타인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책임

〈더 차일드〉의 마지막은 희망적이지 않다. 브루노는 처벌받고, 자유를 잃으며, 더 나은 미래를 약속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지점을 성장의 시작으로 제시한다.

책임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이며, 대가를 감수하는 태도다.

브루노가 선택하는 마지막 행동은 사랑의 선언이 아니라, 책임의 수용이다.

이 영화는 부성애를 본능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부성은 학습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학습은 언제나 늦다.

브루노는 끝내 ‘좋은 아버지’가 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무지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이 불가역성이 이 영화의 윤리다. 한 번 책임을 인식한 인간은 이전의 삶으로 복귀할 수 없다.

〈더 차일드〉는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지속을 요구한다.

책임은 하루 만에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앞으로의 모든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이 영화는 말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선해지는 일이 아니라,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되는 일이라고.

그래서 이 작품은 불편하지만 정직하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지 않기 때문이다.

〈더 차일드〉는 관객에게 질문을 남긴다. 만약 당신이 브루노였다면, 당신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