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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밀양 (이동, 상실, 신앙)

by lhs2771 2025. 12. 23.

밀양 영화 포스터

 

밀양, 신에게 매달린 사람이 끝내 인간의 얼굴을 견뎌야 했던 이야기

밀양은 한 여성이 연속적인 상실을 겪으며 신앙과 용서, 인간의 존엄에 대해 끝까지 흔들리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비극을 극복하는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신앙이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위로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얼마나 잔인한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밀양〉은 ‘용서’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는 고통 앞에서 정말로 신을 찾는 것인지, 아니면 고통을 견딜 언어를 찾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언어가 무너졌을 때, 인간에게 무엇이 남는지를 끝까지 외면하지 않는다.

이동

〈밀양〉은 한 여자의 이동으로 시작된다. 남편을 잃은 신애는 어린 아들과 함께 서울을 떠나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온다. 그녀는 이 이동을 ‘새 출발’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말에는 희망보다 자기 암시가 더 많이 섞여 있다. 지금의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기에, 다른 공간으로 옮기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믿음.

밀양이라는 도시는 겉보기에 평온하다. 햇빛이 많고, 사람들은 친절하며, 일상은 느리게 흘러간다. 신애는 이곳을 “빛이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신애는 아직도 빛이 자신의 상처를 덮어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일찍부터 암시한다. 공간은 상처를 치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낯선 공간은 상처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밀양은 신애의 고통을 흡수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상을 유지할 뿐이다.

이동은 변화가 아니라 유예다. 신애는 아직 자신의 슬픔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상실을 ‘뒤로 미루기’ 위해 이동한다. 이 영화는 그 유예가 얼마나 잔인한 결과로 돌아오는지를 아주 천천히 보여준다.

 

상실

아들의 죽음은 이 영화의 중심 사건이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사건이기도 하다. 〈밀양〉은 비극을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 이후의 시간을 보여준다.

신애의 상실은 즉각적인 절규로 터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감정을 통제하려 한다. 괜찮은 척하고, 일상을 유지하려 애쓴다. 이 억제는 강인함이 아니라 붕괴 직전의 상태다.

이 영화에서 상실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매 순간 반복된다. 아이의 물건, 아이의 이름, 아이를 기억하는 타인의 말 한마디. 이 모든 것이 신애를 다시 무너뜨린다. 상실은 끝나지 않는다. 그저 형태를 바꿀 뿐이다.

이 지점에서 신애는 신앙을 만난다. 신앙은 그녀에게 새로운 언어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뜻”, “시험”, “구원”. 이 언어들은 고통을 설명할 수 있게 해 준다. 설명될 수 있는 고통은 견딜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신앙

〈밀양〉에서 신앙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다. 고통을 질서 안에 넣어주는 체계다. 신애는 신앙을 통해 자신의 상실이 무작위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한다.

교회 공동체는 따뜻하다. 사람들은 신애를 환대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기도한다. 이 장면들만 보면 신앙은 분명 위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위로가 얼마나 조건적인지를 곧 드러낸다.

신앙은 신애에게 ‘용서’를 요구한다. 용서는 신에게 가까워지는 행위이며, 고통을 내려놓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신애는 이 논리를 붙잡는다. 그래야만 자신의 삶이 다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찾아간다. 그리고 말한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잔인하다. 왜냐하면 이 용서는 신애 자신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범인의 말이다. 그는 이미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신애의 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신은 그녀보다 먼저 가해자를 품었다. 이 깨달음은 신앙의 논리를 정면으로 배반한다.

이 순간 〈밀양〉은 묻는다. 신의 용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피해자의 고통은 어디에 놓이는가. 그리고 인간은 그 질서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붕괴

신애는 신앙에서조차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그녀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고, 교회를 거부한다. 하지만 이 거부는 해방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혼란이다.

이후의 신애는 불안정하고, 때로는 공격적이며, 때로는 자기 파괴적이다. 이 영화는 이 상태를 미화하지 않는다. 신애는 ‘강한 여성’도, ‘극복한 피해자’도 아니다. 그녀는 무너진 인간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이 붕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애는 회복되지 않는다. 완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이 불완전함이 이 영화의 윤리다.

종찬은 끝까지 신애 곁에 남아 있다. 그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신을 대신하지도, 위로의 말을 남발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떠나지 않는다.

이 태도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유일한 인간적 윤리다. 신도, 용서도, 의미도 사라진 자리에서 남는 것은 곁에 머무는 몸이다.

 

인간

〈밀양〉은 끝내 신을 증명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드러낸다. 오만하고, 무력하며, 동시에 누군가의 곁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 영화는 관객에게 위로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불편함을 남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용서하라”라고 말해왔는지, “신의 뜻”이라는 말로 고통을 정리해 왔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밀양〉에서 용서는 미덕이 아니라 폭력이 될 수 있다. 신앙은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억압이 될 수 있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끝까지 숨기지 않는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명확한 메시지가 아니다. 대신 질문이다. 우리는 고통 앞에서 무엇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

〈밀양〉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잔인하게 정직한 작품 중 하나다. 이 영화는 인간이 끝까지 붙잡고 싶어 하는 모든 ‘의미’를 하나씩 벗겨낸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 아무것도 세워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바로 그 빈자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이 침묵한 자리에서, 인간은 어떤 얼굴로 남을 수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