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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비포 선 셋 (만남, 대화, 선택)

by lhs2771 2025. 12. 21.

영화 비포 선 셋 포스터

 

비포 선셋,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앞에 두고 우리는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까

비포 선셋은 9년 전 하룻밤을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눴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 단 몇 시간 동안 파리의 거리를 걷고 머무르며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선택, 그리고 시간의 잔혹함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극적인 사건도, 눈에 띄는 반전도 없다. 대신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후회,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감정,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다는 조급함이 대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포 선셋〉은 첫사랑의 설렘이 아니라, 어른이 된 뒤에야 마주하게 되는 사랑의 무게와 현실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우리는 왜 중요한 순간을 늘 지나간 뒤에야 알아차리는가”라는 질문을 조용히 던진다.

다시 만났지만, 이미 많은 것이 달라진 두 사람

〈비포 선셋〉은 전작에서 남겨진 약속과 여백 위에서 시작된다. 비엔나의 하룻밤 이후 9년, 제시와 셀린느는 각자의 삶을 살아왔다. 제시는 작가가 되었고, 셀린느는 환경 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가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둘 다 ‘어른이 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안에는 타협과 후회,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영화의 첫 만남은 극적으로 포장되지 않는다. 파리의 한 서점, 책 낭독회가 끝난 뒤 조심스럽게 마주한 두 사람의 표정에는 반가움과 동시에 경계가 담겨 있다. 이 짧은 순간은 지난 9년의 시간을 압축해 보여준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알아보고, 동시에 더 이상 예전처럼 가볍게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재회를 ‘로맨틱한 기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재회는 불편하다. 그동안 각자의 삶에서 쌓아온 선택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고, 그 선택들이 이 만남을 복잡하게 만든다. 〈비포 선셋〉은 이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꺼내 놓는다.

영화는 묻는다. 만약 과거에 스쳐 지나간 누군가를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과연 그 사람 앞에서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솔직함을 감당할 용기는 과연 남아 있을까. 이 질문은 파리의 거리를 따라 걸으며 점점 더 무거워진다.

 

설렘 대신 후회가, 기대 대신 진실이 오가는 대화

〈비포 선셋〉의 대부분은 걷고 말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대화는 〈비포 선라이즈〉와 분명히 다른 온도를 지닌다. 젊은 날의 대화가 생각의 실험과 감정의 탐색이었다면, 이 영화의 대화는 이미 살아본 삶의 결과를 꺼내놓는 시간에 가깝다.

제시는 결혼 생활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안정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안정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셀린느 역시 관계 속에서 느껴온 좌절과 분노, 그리고 사랑에 대한 냉소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이 대화들은 아름답기보다는 날것에 가깝다. 하지만 바로 그 날것의 감정이 이 영화를 진짜로 만든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더 이상 미래형이 아니다. “언젠가”나 “어쩌면”이라는 말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때 우리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는 가정이 반복된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에게 끌리지만, 그 감정은 설렘보다 후회에 더 가깝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그 사실을 알기에 대화는 점점 더 절박해진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영화가 침묵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말과 말 사이의 멈춤, 시선이 어긋나는 순간, 잠시 발걸음을 늦추는 장면들은 어떤 대사보다 많은 감정을 담고 있다. 이 침묵은 두 사람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간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다. 제시의 비행기 시간은 계속해서 다가오고, 관객 역시 그 제한된 시간을 인식하게 된다. 이 압박은 대화를 더욱 밀도 있게 만든다. 더 이상 망설일 여유도, 감정을 미루어 둘 시간도 없다. 〈비포 선셋〉은 이 조급함을 과장하지 않고, 일상적인 호흡 속에 스며들게 한다.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더 현재에 집중한다. 과거의 이야기는 충분히 나누었고, 이제 남은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뿐이다. 이 질문은 명확한 답을 요구하지 않지만, 선택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선택의 무게는, 어른이 된 두 사람에게 결코 가볍지 않다.

 

이번에는 시간을 핑계로 도망치지 않겠다는 선택

〈비포 선셋〉의 마지막 장면은 많은 관객에게 오래도록 남는다. 셀린느의 집, 흐르는 음악, 그리고 제시의 미묘한 표정. 영화는 명확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지만, 감정의 방향만큼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번에는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선택, 혹은 최소한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이 영화가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사랑을 완성된 상태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사랑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주 현실과 책임을 핑계로 미뤄왔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비포 선셋〉의 제시와 셀린느는 더 이상 젊지 않기에, 이번 선택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려 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다시 만나고 싶었던 사람, 하지 못했던 말, 그때 용기 내지 못했던 선택들. 〈비포 선셋〉은 그런 기억들을 조용히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결국 이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라, 솔직해질 용기의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모든 것을 정리하려 애쓰기보다, 지금 이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 선택이 가장 진실한 답일 수 있다고. 〈비포 선셋〉은 그 선택의 무게를 미화하지도, 비극으로 만들지도 않은 채, 아주 현실적인 온도로 관객의 마음에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