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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이 캔 스피크 (말, 침묵, 증언, 존엄)

by lhs2771 2025. 12. 24.

아이 캔 스피크 영화 속 한 장면

 

아이 캔 스피크, 웃음으로 시작해 끝내 침묵의 역사를 깨뜨리는 한 인간의 목소리

아이 캔 스피크는 매일같이 민원을 넣는 괴짜 할머니와 원칙주의 공무원의 관계를 코미디처럼 시작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무거운 침묵으로 나아가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비극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웃음을 통해 관객의 방어를 풀고, 그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 오래도록 말해지지 않았던 기억과 존엄의 문제를 놓는다. 〈아이 캔 스피크〉는 피해를 설명하지도, 대신 말해주지도 않는다. 오직 한 사람이 자기 언어로 자기 삶을 말할 권리를 되찾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다. 이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과연 그동안 듣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듣지 않으려 했던 것인지를.

〈아이 캔 스피크〉의 첫인상은 가볍다. 나옥분 할머니는 동네 구청에서 악명 높은 ‘민원왕’이다. 그녀는 사소한 일에도 민원을 넣고, 공무원들을 곤란하게 만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준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녀를 호감형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귀찮고, 말이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로 등장시킨다.

이 설정은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말이 많은 사람’에 대한 사회의 시선을 정면으로 보여준다. 나옥분의 말은 문제 제기가 아니라 소음으로 취급된다. 그녀의 요구는 권리가 아니라 귀찮음이 된다. 이 사회는 이미 누군가의 말을 걸러 듣는 법에 익숙하다.

나옥분이 영어를 배우겠다고 나서는 장면 역시 처음에는 웃음의 대상이다. 나이 많은 할머니가 갑자기 영어를 배우겠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은 묻는다. “그 나이에 영어를 왜 배우세요?” 이 질문은 친절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명확한 선이 그어져 있다. 누가 배울 수 있고, 누가 말해도 되는지를 나이와 위치로 구분하는 선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말한다는 것은 단순한 의사 표현이 아니라, 사회가 허락해야만 가능한 행위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허락은 언제나 불균등하게 주어져 왔다는 사실을.

 

침묵

영화의 중반부에 이르러, 나옥분이 영어를 배우려는 진짜 이유가 드러난다. 그녀는 미국 법정에서 증언하기 위해 영어를 배운다. 이 순간 영화의 톤은 급격히 바뀐다. 웃음은 멈추고, 화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나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 사실을 처음부터 내세우지 않는다. 이는 회피가 아니라 선택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피해 사실 자체보다, 그 피해가 얼마나 오래 침묵 속에 방치되어 왔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나옥분은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말해도 믿어주지 않았고, 말하면 불편해졌으며, 말할수록 혼자가 되었다. 침묵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한 결과였다.

이 영화에서 침묵은 단순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이 개인에게만 갇혀 있는 상태다. 나옥분은 살아왔지만, 그녀의 삶 한가운데에는 공유되지 못한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은 말해지지 않았기에,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아이 캔 스피크〉는 이 침묵을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 침묵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고립시키는지를 아주 천천히 보여준다. 침묵은 보호가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었음을.

 

증언

나옥분이 영어를 배우는 과정은 단순한 학습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다시 언어로 끌어올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익힐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다시 통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공무원 민재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제한적이다. 그는 조력자이지, 대변인이 아니다. 이 영화는 끝까지 나옥분의 목소리를 중심에 둔다. 누군가 대신 말해주는 순간, 증언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민재는 처음에는 이 일을 ‘도와주는 것’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깨닫는다. 이 일은 도움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라는 사실을. 나옥분은 동정을 원하지 않는다. 발언권을 원한다.

법정에서의 증언 장면은 이 영화의 정점이다. 나옥분의 영어는 유창하지 않다. 문법은 틀리고, 발음은 어눌하며, 문장은 자주 끊긴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이 이 장면을 압도한다.

그녀는 잘 말하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말한다. 그리고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이 순간을 통해 보여준다. 증언의 힘은 정확함이 아니라, 주체성에 있다는 것을.

 

존엄

〈아이 캔 스피크〉는 용서를 말하지 않는다. 화해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대신 ‘말한다’는 행위 자체의 의미를 끝까지 붙든다. 말한다는 것은 과거를 지우는 행위가 아니라, 과거를 자신의 삶 속에 다시 놓는 행위라는 점을.

나옥분이 “아이 캔 스피크”라고 말하는 순간, 그 문장은 단순한 영어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선언이다. 침묵의 시간에 대한 종결 선언이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는 선언이다.

이 영화는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눈물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오래 듣지 않았는지를.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의 말을 ‘귀찮음’으로 치부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아이 캔 스피크〉는 웃음으로 관객을 불러들이고, 침묵으로 붙잡은 뒤, 끝내 한 사람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남긴다. 그 목소리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영화가 중요한 이유는, 역사를 설명해서가 아니다. 대신 역사가 말하게 하기 때문이다. 피해를 정리하지 않고, 대신 말하게 함으로써.

〈아이 캔 스피크〉는 말한다. 기억은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지고, 증언되지 않으면 다시 침묵 속으로 밀려난다고. 그래서 말하는 것은 언제나 늦지 않으며, 언제나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 말은, 반드시 그 사람의 목소리여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