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로 이어지지 않아도, 함께 살아온 시간은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줄거리 - 함께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어느 가족은 범죄 영화처럼 시작하지만, 곧 그 틀을 벗어나 인간관계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향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오사무와 어린 소년 쇼타는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친다. 이 장면은 자극적으로 보이지만, 영화는 이를 스릴이나 도덕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이 행동이 이 가족의 일상임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오사무와 쇼타는 허름한 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오사무의 아내 노부요, 할머니 하츠에, 그리고 젊은 여성 아키가 함께 살고 있다. 이들은 혈연으로 얽혀 있는 듯 보이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그 관계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하루를 묻고,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을 반복한다.
어느 겨울밤, 오사무와 쇼타는 집 앞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 소녀 유리를 발견한다. 유리는 부모에게 방치된 상태로, 몸에는 학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오사무는 잠시 망설이다가, 유리를 집으로 데려온다. 이 선택은 선의와 범죄의 경계를 동시에 넘는다.
처음에 유리는 ‘잠시 보호’의 대상이지만, 점점 이 가족의 일원이 되어간다. 그녀는 노부요에게서 따뜻한 손길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함께 밥을 먹으며 웃는다. 이 집에서 유리는 더 이상 소외된 존재가 아니다.
영화는 이 가족의 삶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그들은 가난하다. 오사무는 일용직 노동자이며, 노부요는 공장에서 일한다. 아키는 성인용 업소에서 일하며, 하츠에는 연금으로 생계를 보탠다. 이들의 삶은 언제나 불안정하다.
그러나 영화는 이 가난을 비극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이 가족은 서로의 결핍을 알고 있고, 그것을 나누며 살아간다. 하츠에는 자신의 연금을 가족에게 나눠주고, 아이들은 서로에게서 배운다. 쇼타는 유리에게 훔치는 법을 가르치며, 그것이 가족의 ‘기술’처럼 전해진다.
여름이 오고, 이 가족은 잠시나마 평온한 시간을 보낸다. 바닷가로 떠난 여행, 물놀이, 웃음. 이 장면들은 영화에서 가장 밝지만, 동시에 가장 불안하다. 관객은 이 시간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건은 발생한다. 경찰의 개입으로 이 가족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들은 법적으로 가족이 아니다. 유리는 유괴된 아이로 규정되고, 오사무와 노부요는 범죄자로 분류된다. 이 순간 영화는 차갑게 질문한다. 법은 이들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후반부에서 가족은 해체된다. 아이들은 분리되고, 각자는 사회가 정한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해체는 곧 회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다시 ‘정상적인 환경’으로 돌아가지만, 그곳이 더 안전한 지는 확신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쇼타는 오사무를 “아빠”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법적으로 무효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어느 가족의 줄거리는 이 한 단어로 수렴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감상포인트 - 혈연·가난·윤리·선택된 가족
어느 가족의 가장 중요한 감상 포인트는 이 영화가 ‘가족’을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결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가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만들어진다.
첫 번째 감상 포인트는 혈연의 해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대부분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돌보고, 책임진다. 반면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들은 아이를 방치하거나 학대한다. 영화는 혈연이 반드시 보호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두 번째 감상 포인트는 가난과 범죄의 경계다. 이 가족의 범죄는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영화는 이를 정당화하지 않지만, 단순히 비난하지도 않는다. 대신 질문을 던진다.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선택지는 있었는가.
세 번째 감상 포인트는 사회의 시선이다. 경찰과 제도는 이 가족을 해체하며, 아이들을 ‘정상’으로 돌려보낸다. 그러나 영화는 이 정상성이 과연 안전한 지를 묻는다. 유리는 다시 부모에게 돌아가지만, 그 환경이 더 나아졌다는 증거는 없다.
연출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멀찍이서 인물들을 바라보고, 판단을 관객에게 맡긴다. 이 거리감이 오히려 감정을 깊게 만든다.
벚꽃 안도의 연기는 특히 인상적이다. 노부요는 완벽한 보호자가 아니지만, 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녀의 불안한 눈빛과 조심스러운 손길은 이 영화의 핵심이다.
감상평 - 우리는 누구에게 가족이었는가
어느 가족을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남는 감정은 불편함이다. 이 영화는 위로를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가족을 정의해 왔는가.
이 영화는 선과 악의 경계를 흐린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범죄자이지만, 동시에 보호자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지만, 무책임하지도 않다. 이 모순은 현실의 얼굴과 닮아 있다.
영화는 묻는다. 법과 제도가 정의한 가족이 실제로 아이를 보호하지 못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쇼타가 마지막에 부르는 “아빠”라는 호칭은 이 영화의 결론이다. 이 말은 늦게 나왔지만, 그만큼 무겁다. 그것은 혈연이 아니라 선택과 시간이 만든 관계다.
어느 가족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보여준다. 가족은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상처를 감싸는 관계라는 사실을.
그래서 이 영화는 보고 난 뒤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이 가족이 옳았는지, 사회가 옳았는지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가족은 끝난 뒤에도 남는다. 질문으로, 그리고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