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댑테이션, 이야기를 쓰는 순간 인간은 왜 반드시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가
어댑테이션은 각색 영화라는 외형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창작이라는 행위 자체를 해부대 위에 올려놓은 자전적 고백에 가깝다. 이 영화는 ‘원작을 충실히 옮기고 싶다’는 윤리적 욕망과 ‘이야기는 결국 이야기답게 흘러가야 한다’는 산업적 현실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기는 한 인간의 내면을 그대로 노출한다. 〈어댑테이션〉은 각색에 성공하는 법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각색이 왜 본질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에만 비로소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역설을 증명한다. 이 작품은 묻는다. 창작자는 어디까지 정직해야 하는가. 관객을 만족시키는 선택은 배신인가, 아니면 또 다른 진실인가. 그리고 결국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이 영화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그 모순의 증거가 된다.
정체성
〈어댑테이션〉의 출발점은 ‘쓰지 못하는 작가’ 찰리 코프먼이다. 그는 게으르지도, 무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는 지나치게 성실하고, 지나치게 윤리적이며, 지나치게 자신을 의심한다. 그는 원작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고, 인위적인 갈등이나 조작된 감정을 혐오한다. 그의 이상적인 각색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곧 이 이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영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은 갈등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고, 서사는 우연과 반복, 무의미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막힌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검열한다. 이 장면은 진실한가, 이 감정은 관객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이 대사는 작가의 허영이 아닌가. 이러한 자기 검열은 그를 더 윤리적인 작가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인간으로 만든다.
〈어댑테이션〉은 여기서 창작자의 정체성이 어떻게 자기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찰리는 작가이기 이전에 비평가이며, 관객이기 이전에 검사다. 그는 자신을 단 한 순간도 믿지 않는다.
이 분열은 도널드라는 쌍둥이 형제를 통해 가시화된다. 도널드는 클리셰를 사랑하고, 관객의 욕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공식적인 서사 구조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는 가볍고, 단순하며, 성공한다.
도널드는 찰리의 그림자가 아니다. 그는 찰리가 억압해 온 또 다른 자아다.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아, 관객을 의식하는 자아, 이야기가 재미있어야 한다고 믿는 자아다.
〈어댑테이션〉은 묻는다. 정직한 창작이란 무엇인가. 자기 욕망을 억압한 채 쓰는 글이 과연 더 순수한가. 아니면 욕망을 인정하고 형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더 솔직한 태도인가.
찰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영화 속 인물로 등장시킨다. 이 선택은 용기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회피다. 그는 더 이상 원작을 각색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각색한다.
이 순간, 영화는 선언한다. 모든 창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각색
〈어댑테이션〉의 핵심 갈등은 ‘이야기를 어떻게 옮길 것인가’가 아니라,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있다. 찰리는 원작이 가진 비서사성, 즉 명확한 갈등도 클라이맥스도 없는 상태를 그대로 영화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관객은 변화와 갈등을 요구하고, 인물의 욕망과 선택을 기대한다. 이 요구는 상업적 강요이자, 동시에 이야기라는 형식의 본질이다.
찰리는 이를 거부하지만, 거부할수록 그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는 선택은 곧 영화 자체를 부정하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잔혹함은 결국 찰리가 자신이 경멸하던 모든 요소를 차례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다. 추격, 사랑, 배신, 폭력, 죽음. 그는 그것들을 혐오하면서도, 그것 없이는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 순간 〈어댑테이션〉은 스스로를 배신한다. 그러나 바로 그 배신 덕분에 영화는 완성된다. 이 자기모순은 실패가 아니라 증명이다.
이 영화는 말한다. 각색은 번역이 아니라 변형이며, 변형은 언제나 원본을 훼손한다고. 그리고 그 훼손을 부정하는 순간, 창작은 멈춘다고.
찰리는 끝내 타협한다. 그러나 그 타협은 항복이 아니다. 그것은 각색이라는 행위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어댑테이션〉은 이 과정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관객이 보고 있는 영화 자체가 바로 그 타협의 결과물임을.
그래서 이 영화는 각색 영화가 아니라, 각색에 대한 고백문이다. 실패를 인정함으로써만 완성되는 이야기의 역설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욕망
〈어댑테이션〉이 끝내 도달하는 지점은 관객의 욕망이다. 우리는 독창성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익숙한 감정의 흐름을 요구한다. 우리는 새로운 영화를 원하면서도, 이해 가능한 구조를 원한다.
찰리는 관객을 믿지 못한다. 그는 관객이 자신의 침묵과 반복, 무의미를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다.
이 영화는 관객을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정직하게 고백한다. 이야기란 결국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다고.
찰리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욕망을 인정한다. 그는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으며, 실패하고 싶지 않다.
이 인정은 해방이 아니라 체념에 가깝다. 그는 완벽한 각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어댑테이션〉은 창작을 신성화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불안정하고, 자기기만적이며, 동시에 필연적인 행위로 묘사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웃기지만, 동시에 잔인하다. 그것은 창작자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가장 냉정한 진단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모든 이야기는 실패한 채로 완성되며, 그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에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고.
〈어댑테이션〉은 각색의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창작이라는 인간적 욕망이 끝내 스스로를 배신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증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끝난 뒤에도 남는다. 완성된 이야기보다,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