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남자 오대수는 어느 날 갑자기 납치되어 이유도 모른 채 15년 동안 감금된다.
그는 자신을 가둔 자가 누구인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를 모른 채 세월을 보낸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풀려난 오대수는 복수를 결심하고 진실을 추적하지만,
그 여정의 끝에는 상상조차 못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끝없는 굴레의 시작. 복수!
〈올드보이〉는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다.
오대수가 15년 동안의 억울함을 되갚기 위해 시작한 복수는,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끝없는 굴레로 변한다.
그의 분노와 집착은 정당한 정의의 감정이라기보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절박한 몸부림이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를 단순한 카타르시스의 장치로 그리지 않는다.
그는 ‘복수란 과연 해방일까, 아니면 또 다른 감금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오대수의 눈빛에는 분노보다 더 깊은 허무가 깃들어 있고, 그의 칼날은 타인을 향하지만, 결국 자신을 베게 된다.
영화는 복수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며, ‘복수의 끝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는 냉혹한 진실을 남긴다.
그래서 〈올드보이〉는 폭력의 미학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파괴적 욕망을 가장 극단적으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선과 악의 경계에선 인간의 본성
〈올드보이〉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짐승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감금과 고통 속에서 오대수는 인간성을 잃어가고, 자유를 되찾은 순간조차 복수라는 또 다른 감옥에 갇힌다.
박찬욱은 인간의 선악을 흑백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 복수자와 희생자 — 그 경계는 흐려지고, 모든 인물은 자신만의 상처와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
악은 언제나 타인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숨어 있던 또 다른 나로부터 태어난다.
〈올드보이〉가 남긴 불편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이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 혼란과 모순 자체가 인간의 진짜 얼굴임을 보여준다.
기억과 죄의식 — 진실은 구원이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모든 진실이 드러날 때, 관객은 충격보다 깊은 허무와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오대수가 찾아 헤매던 진실은 복수의 완성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가 낳은 또 다른 비극의 실체였다.
올드보이〉는 말한다.
기억은 진실로 가는 열쇠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키는 독이다.
오대수는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결코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그의 눈물은 후회와 망각, 그리고 끝없는 속죄의 상징이다.
“기억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지만, 그 기억이 죄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감옥에 갇힌다.”
이 영화는 복수를 마친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 속에서 스스로를 갇히게 한 인간의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인간의 그림자를 응시하라
〈올드보이〉는 충격적인 반전으로 기억되는 영화이지만, 그 본질은 ‘복수의 드라마’가 아닌 인간 존재의 철학적 고찰이다.
복수는 인간의 본능이고, 기억은 인간의 굴레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애쓴다.
박찬욱 감독은 묻는다.
“당신이 진실을 안다면, 그 기억을 견딜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이 남긴 불편한 여운이야말로,
〈올드보이〉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강렬하게 살아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