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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야기, 예의, 상실)

lhs2771 2025. 12. 23. 08:13

그랜드 부다페스트 영화 속 한 장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사라진 세계를 끝까지 예의 바르게 애도하는 이야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가상의 유럽 국가 주브로브카를 배경으로, 한 호텔과 그곳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세계’를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영화다. 이 작품은 화려한 색감과 기하학적인 구도, 빠른 대사와 유머로 유명하지만, 그 핵심에는 전쟁과 폭력, 시대의 붕괴 속에서 인간이 끝까지 지키려 했던 품위와 존엄에 대한 깊은 애도가 자리하고 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단순한 코미디도, 스타일리시한 동화도 아니다. 이 영화는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사라진 세계를 기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매우 진지하고 슬픈 이야기다.

이야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시작부터 현재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영화는 여러 겹의 시간 위에 놓여 있다. 작가가 한 여인의 묘지를 방문하는 현재, 그가 젊은 시절 만났던 노인의 기억, 그리고 그 노인이 다시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 이 복잡한 액자 구조는 단순한 장치가 아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선언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이미 사라진 세계에 대한 ‘기억의 재현’이며, 완전할 수 없고 왜곡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이 구조는 영화의 모든 정서를 지배한다. 등장인물들은 어딘가 연극적이고, 장면들은 과장되어 있으며, 현실감은 의도적으로 희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가볍기 때문이 아니다. 기억이란 언제나 이렇게 과장되고, 아름답게 미화되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남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사실을 재현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을 보존하려 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이곳은 한 시대의 가치관, 취향, 태도가 응축된 장소다. 전쟁 이전 유럽이 가지고 있던 낭만, 질서, 계급, 그리고 허위의식까지 모두 이 호텔 안에 담겨 있다. 호텔이 점점 쇠락해 가는 과정은, 유럽이라는 공간이 겪은 역사적 붕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다룬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늘 과거형이며, 이미 끝난 것에 대한 기록처럼 느껴진다. 웃음 속에 묻어 있는 이 슬픔이 이 영화를 단순한 코미디에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작품으로 끌어올린다.

 

예의

무슈 구스타브는 이 영화에서 가장 기이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중시하고, 말투는 과장되었으며, 행동은 연극적이다. 현대적인 시선으로 보면 그는 우스꽝스럽고, 심지어 촌스럽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를 결코 조롱하지 않는다.

구스타브에게 예의란 단순한 매너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무너질 때 인간이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윤리다. 전쟁이 다가오고, 폭력이 일상화되고, 권력이 무자비해질수록 그는 더 집요하게 예의를 지킨다. 이 태도는 시대착오가 아니라, 저항에 가깝다.

그는 귀족과 하인, 부자와 난민을 구분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같은 예의를 적용한다. 이 점에서 구스타브는 이 영화에서 가장 평등한 인물이다. 그는 계급 사회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그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인간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제로와의 관계는 이 태도를 가장 잘 보여준다. 제로는 난민 출신의 소년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구스타브는 그를 보호의 대상이나 연민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는 제로를 동료로 대하며, 예의를 가르치고, 책임을 맡긴다. 이 관계는 단순한 사제 관계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태도의 실천이다.

이 영화에서 우아함은 외형이 아니라 태도다. 구스타브의 향수, 말투, 시 낭송은 모두 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폭력적인 세계 속에서 그는 끝까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예의’라는 갑옷을 입는다.

 

상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웃음은 항상 상실과 나란히 존재한다. 농담이 끝날 때마다 무언가가 사라지고, 장면이 바뀔 때마다 세계는 조금씩 더 황폐해진다. 전쟁은 배경이 아니라, 이 모든 상실의 원인이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이 상실을 비극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그 상실 앞에서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집중한다. 세계는 무너질 수 있지만,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구스타브의 최후는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는 시대의 폭력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사라진다. 그 죽음은 영웅적이지도, 장엄하지도 않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 이 영화는 말한다. 폭력적인 시대는 가장 예의 바른 사람부터 제거한다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호텔도, 부도, 명성도 아니다. 남는 것은 이야기다. 누군가가 기억하고, 누군가가 전하는 한 그 세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 영화가 복잡한 액자 구조를 고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세계는 잔인하게 변할 수 있지만,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그것은 힘도, 권력도 아닌, 타인을 대하는 태도라고.

이 영화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예쁘고 기발해서가 아니다. 사라진 세계를 애도하면서도, 그 세계가 지니고 있던 가치를 끝까지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웃음으로 시작해, 깊고 조용한 슬픔으로 끝나는, 매우 성숙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