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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바벨 (단절, 언어, 연결)

lhs2771 2026. 1. 1. 10:14

바벨 영화 속 한 장면

 

바벨, 모두가 연결된 시대에 인간은 왜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가

바벨은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교차 편집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연결된 세계가 어떻게 인간을 더 고립시키는가’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오해에서 비롯된 비극을 감정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 오해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증폭되고, 권력과 언어의 불균형 속에서 왜곡되며, 결국 개인의 삶을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밀어내는지를 차갑게 관찰한다. 총 한 발로 시작된 사건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의 축소판이다. 〈바벨〉은 묻는다. 우리는 정말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단지 같은 시스템 안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고립되어 있을 뿐인가. 이 영화는 이해의 실패를 개인의 한계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끝까지 드러낸다.

단절

〈바벨〉의 세계는 처음부터 분절되어 있다. 모로코의 사막, 멕시코 국경, 일본 도쿄. 이 공간들은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 거리를 좁히지 않는다. 대신 그 거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사건들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모로코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은 의도된 범죄가 아니다. 아이들의 장난과 가난, 무지와 호기심이 만들어낸 우연이다. 그러나 이 우연은 곧 국제적 사건으로 재정의된다.

총을 맞은 것은 한 개인이지만, 그 총성은 국경을 넘는다. 언론은 즉각 반응하고, 외교적 긴장은 고조되며, 지역적 사건은 ‘테러 가능성’이라는 프레임으로 재편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삭제되는 것은 맥락이다. 아이들이 왜 총을 가졌는지, 그 총이 어떻게 그곳에 왔는지, 그 지역의 삶이 어떤 조건 속에 놓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벨〉은 단절이 단순한 거리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단절은 해석의 문제이며, 누가 해석의 주도권을 가지는가의 문제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떤 국가의 언어로 설명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모로코 농부의 언어는 국제 뉴스에서 힘을 잃고, 영어로 번역된 서사만이 ‘공식적 진실’로 남는다.

멕시코 국경에서 벌어지는 사건 역시 단절의 또 다른 얼굴이다. 가족을 위한 선택은 법의 언어 안에서 범죄로 재정의되고, 개인의 사정은 시스템 앞에서 무력해진다.

국경은 안전을 위한 장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약한 사람들을 가르는 선으로 작동한다. 넘을 수 없는 것은 물리적 경계가 아니라, 설명될 수 없는 삶의 맥락이다.

〈바벨〉에서 단절은 고립이 아니다. 그것은 연결된 세계 속에서 발생하는 ‘비대칭적 이해’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영화의 세계는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오해한 채 나란히 존재한다.

 

언어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듯, 〈바벨〉은 언어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권력이며, 배제의 도구다.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들리지 않는가의 문제는 곧 누가 보호받고 누가 희생되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일본 파트에 등장하는 청각장애 소녀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인물이다. 그녀는 말을 할 수 없지만, 누구보다 많은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은 번역되지 않는다. 그녀의 몸짓과 시선은 오해와 불편함을 낳고, 결국 고립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는 묻는다. 소통이란 정말로 말의 문제인가, 아니면 이해하려는 태도의 문제인가.

모로코의 부모들은 자신의 언어로 억울함을 설명하지만, 그 언어는 세계 시스템 안에서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반면 영어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즉시 외교적 사안이 되고, 군사적 개입의 근거가 된다.

〈바벨〉은 언어의 위계를 숨기지 않는다. 어떤 언어는 세계를 움직이고, 어떤 언어는 침묵 속에 묻힌다.

통역과 번역은 이 격차를 메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미를 축소하고 감정을 제거한다.

번역되는 순간, 고통은 정보로 바뀌고, 정보는 관리의 대상이 된다.

이 영화에서 언어는 이해를 돕지 않는다. 오히려 오해를 제도화한다.

그래서 〈바벨〉의 세계에서는 말을 할수록 더 고립된다. 언어는 다리를 놓는 대신, 벽을 세운다.

 

연결

〈바벨〉은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연결성을 집요하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연결은 구원의 통로가 아니다. 그것은 비극이 전파되는 경로다.

한 지역에서의 작은 선택은 다른 대륙의 삶을 뒤흔든다. 그러나 그 영향은 결코 대칭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우연의 결과로 죽음을 맞고, 어떤 사람은 같은 우연으로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다.

이 영화에는 명확한 가해자도, 완전한 피해자도 없다. 모두가 구조의 일부다.

부모는 아이를 보호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국가는 질서를 유지하려 하지만 폭력을 확대한다.

〈바벨〉은 이 실패를 개인의 도덕성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구조의 작동 방식으로 설명한다.

연결된 세계에서는 책임이 분산되고, 그 분산은 무책임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위로를 주지 않는다. 연결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확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침묵은 이 영화의 결론이다. 이해는 완성되지 않고, 오해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바벨〉은 말한다. 세계는 하나로 묶일수록 더 복잡해지며, 그 복잡성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고립된다고.

이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이 연결된 세계에서 정말로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같은 사건을 다른 언어로 소비하고 있을 뿐인가.

그리고 그 소비가 또 다른 단절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바벨〉은 끝내 답하지 않는다. 대신 연결된 세계의 침묵을 오래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