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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쉰들러 리스트 (사람, 인간의 얼굴, 죄책감)

lhs2771 2025. 12. 25. 08:29

쉰들러 리스트 영화 속 한 장면

 

쉰들러 리스트, 선해지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아는 사람이 끝내 선택한 인간의 마지막 존엄

쉰들러 리스트는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집단 학살 속에서 한 독일인 사업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따라가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영웅의 탄생을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방관자로 시작한 인간이 점점 자신의 침묵과 이익, 안전을 의심하게 되는 과정을 집요하게 기록한다. 〈쉰들러 리스트〉는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대신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물렀던 회색지대, 즉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늦고 고통스러운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감동을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을 요구하기 위해 존재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던 사람

오스카 쉰들러는 처음부터 구원자가 아니다. 그는 전쟁을 기회로 삼은 사업가다. 그에게 전쟁은 비극이 아니라 시장이다. 혼란은 돈이 되고, 억압은 효율을 만든다. 그는 이 구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활용한다.

쉰들러에게 유대인은 노동력이다. 값싸고, 대체 가능하며, 국가가 보호해 주는 자원. 그는 그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할 이유도 느끼지 않는다. 바로 이 무감각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쉰들러 리스트〉는 쉰들러를 악인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대신 훨씬 더 불편한 위치에 둔다.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다. 시대에 잘 적응하고, 규칙을 따르며, 시스템 안에서 성공한 인물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관객을 쉰들러 옆에 세운다. 우리는 그를 쉽게 비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쉰들러처럼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소수의 광적인 악인이 만든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침묵, 계산, 무관심이 축적된 결과다. 〈쉰들러 리스트〉는 이 사실을 쉰들러의 태도를 통해 드러낸다.

그는 학살을 본다. 총성이 들리고, 사람들이 쓰러진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파티를 열고, 술을 마시고, 더 큰 공장을 꿈꾼다.

이 장면들이 잔인한 이유는, 쉰들러가 괴물이 아니라 우리와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직접 가해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막지도 않는 태도. 이것이 이 영화가 겨누는 첫 번째 인간상이다.

〈쉰들러 리스트〉는 묻는다. 악은 언제 시작되는가. 총을 드는 순간인가, 아니면 눈을 돌리는 순간인가.

 

보게 되어버린 인간의 얼굴

쉰들러의 변화는 계시처럼 오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느리고, 불완전하며, 반복적인 과정이다. 그는 갑자기 정의를 깨닫지 않는다. 대신 점점 더 많은 얼굴을 보게 된다.

게토 청산 장면은 이 영화의 심장이다. 질서 정연한 학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들, 숫자로 정리되는 죽음. 이 모든 것 속에서 쉰들러는 단 하나의 예외를 본다.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는 상징이지만, 동시에 현실이다. 그녀는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이름도, 대사도 거의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익명성이 그녀를 더 잔인하게 만든다.

그 아이는 ‘누군가의 딸’이었고, ‘살아 있던 인간’이었다. 그러나 시스템은 그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쉰들러는 처음으로 그 사실을 ‘본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쉰들러가 여전히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구하지 않는다. 그는 뛰어들지 않는다. 그는 그저 본다.

하지만 이 ‘봄’은 이전의 봄과 다르다. 그는 더 이상 숫자로 보지 못한다. 사람의 얼굴이 숫자를 밀어낸다.

이후 쉰들러는 점점 더 많은 타협을 한다. 그는 여전히 계산하지만, 계산의 방향이 달라진다. 이익을 위해 쓰던 돈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비용으로 변한다.

이 영화는 쉰들러를 성인군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술을 마시고, 허세를 부리고, 자기 연민에 빠진다. 그의 선함은 순수하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선은 언제나 불완전한 인간의 손을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

〈쉰들러 리스트〉는 이 지점에서 윤리를 이상화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행동할 수 있는가를.

 

너무 늦게 도착한 죄책감

쉰들러는 결국 수많은 생명을 살려낸다. 그의 명단은 역사에 남고, 그는 구원자로 기억된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후, 쉰들러는 무너진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떠올린다.

“이 차를 팔았으면 한 명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이 대사는 이 영화의 모든 윤리를 압축한다.

쉰들러의 눈물은 감동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침묵과 타협을 완전히 인식했을 때 반드시 도착하는 감정이다.

이 죄책감은 영웅 서사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쉰들러 리스트〉는 이 지점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선한 행동은 과거의 방관을 지우지 못한다. 구원은 면죄부가 아니다. 이 영화는 이 사실을 끝까지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언제 행동할 것인가. 그리고 그 행동은 얼마나 늦어질 것인가.

〈쉰들러 리스트〉가 지금까지도 견디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과거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말한다. 악은 괴물처럼 등장하지 않는다고. 선 역시 영웅처럼 등장하지 않는다고. 둘 다 아주 평범한 선택에서 시작된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는다. 우리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