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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시카고 7 (기소, 언어, 기억)

lhs2771 2025. 12. 31. 22:38

시카고 7. 영화 속 한 장면

 

시카고 7, 법정에 세워진 것은 피고가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였다

시카고 7은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와 그 이후의 재판을 다룬 실화 기반 영화이지만, 이 작품의 진짜 주제는 특정 사건의 진위 여부가 아니다. 이 영화가 끝까지 파고드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이 어떻게 정치의 도구가 되는가, 그리고 정의가 형식으로만 남았을 때 개인은 어떤 위치로 밀려나는 가다. 〈시카고 7〉에서 법정은 중립적인 판단의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결론이 정해진 이야기 위에 형식을 덧씌우는 공간이며, 질서를 위협하는 목소리를 통제하기 위한 무대다. 이 영화는 묻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은 정말로 시민을 보호하는 장치인가, 아니면 권력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에 불과한가. 그리고 이 질문을 통해, 말할 자유와 침묵을 강요받는 자유 사이의 간극을 끝까지 드러낸다.

기소

영화는 시카고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전 시위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시위의 열기나 이상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시카고 7〉은 시위가 끝난 이후, 그 사건이 어떻게 재구성되고 재정의되는지에 집중한다.

기소는 자연스러운 법적 절차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곧 그것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선택된 결과임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그 책임은 가장 눈에 띄는 인물들에게 돌아간다.

피고인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묶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이념과 방식, 태도를 지닌 인물들이다. 급진적인 행동주의자, 제도권 내부에서 변화를 모색하려는 인물, 체제 자체를 조롱하는 인물까지, 이들은 결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시카고 7〉은 연대를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이 연대는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강제로 구성된 프레임이다.

재판은 시작부터 불균형하다. 판사는 중립을 가장하지만 반복적으로 피고인의 발언을 제지하고, 검사는 질서와 국가를 대변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이 영화에서 법정은 정의를 찾는 장소가 아니라, 혼란을 정리하기 위한 장치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이야기를 정돈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기소는 단순히 법을 위반했다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이 방식의 저항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다.

그래서 피고인들은 개인이 아니라 상징으로 다뤄진다. 그들의 행위보다 태도가 문제 되고, 말의 내용보다 말하는 방식이 재판의 대상이 된다.

〈시카고 7〉은 이 지점에서 묻는다. 법이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라면, 재판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언어

〈시카고 7〉은 철저히 언어의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치열한 충돌은 폭력이 아니라 말로 이루어진다.

피고인들은 말하려 하지만, 그 말은 반복적으로 중단된다. 맥락은 삭제되고, 발언은 도발로 해석되며, 질문은 무례로 치환된다.

반면 검사의 언어는 질서를 대표한다. 차분하고 논리적인 문장, 국가의 이름을 빌린 단어들은 발언 그 자체로 권위를 가진다.

같은 법정, 같은 언어지만,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무게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것이 이 영화가 드러내는 권력의 실체다.

피고인들이 농담을 던질 때,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위협으로 간주된다. 유머는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태도로 읽힌다.

〈시카고 7〉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말할 자유가 얼마나 조건부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발언은 허용되지만, 그 발언이 불편해지는 순간 통제된다.

언어는 진실을 전달하기보다,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단어 하나, 어조 하나가 곧 불복종의 증거가 된다.

이 과정에서 재판은 점점 연극처럼 변한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대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 영화는 질문한다. 말할 자유가 보장된 공간에서, 실제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자유는 언제, 어떤 기준으로 제한되는가.

 

기억

영화의 후반부는 판결 그 자체보다, 이 재판이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시카고 7〉에게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라 기록이다.

법정에서의 판결은 하나의 문서로 남지만, 그 의미는 사회 속에서 계속 재해석된다.

이 영화는 재판 바깥의 세계를 병치한다. 거리의 시위, 언론의 보도, 개인들의 일상. 법정은 닫히지만, 논쟁은 계속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이름이 하나씩 불려질 때, 법정은 더 이상 권력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장소로 변한다.

〈시카고 7〉은 기억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누가 기억되고, 누가 삭제되는가는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는 정의의 완성을 선언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대신 불완전한 상태를 그대로 남긴다. 법은 존재하지만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시민의 권리는 요구하지 않으면 쉽게 축소된다.

〈시카고 7〉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형이다. 시대와 장소만 바뀔 뿐, 구조는 반복된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으며, 어떤 목소리를 불편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불편함이 정말로 무질서 때문인지, 아니면 권력이 만들어낸 기준 때문인지.

〈시카고 7〉은 조용히 말한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태도이며, 끊임없이 요구되지 않으면 쉽게 형식으로 전락한다고.

그래서 이 영화는 재판 영화가 아니라, 시민에게 던지는 질문에 가깝다. 우리는 어디까지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말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