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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시카리오 (질서, 폭력, 무력)

lhs2771 2025. 12. 31. 08:56

시카리오 영화 속 한 장면

 

시카리오, 정의가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도구가 되는가

시카리오는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을 다룬 범죄 스릴러가 아니다. 이 영화는 정의가 실패한 세계에서 국가와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폭력에 편입되는지를 해부하는 정치적·윤리적 보고서에 가깝다. 〈시카리오〉에는 영웅이 없다.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명분으로만 남아 있고, 윤리는 작전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취급된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누가 옳은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누가 살아남는가”, “누가 필요해지는가”를 묻는다. 정의를 믿는 개인은 이 구조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못한다. 혹은 애초에 이 구조는 그런 개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시카리오〉는 그 냉혹한 사실을 끝까지 숨기지 않는다.

질서

영화는 FBI 요원 케이트 메이서를 중심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법과 절차, 그리고 민간인의 안전을 신뢰하는 인물이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점에 동조한다. 케이트는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정상적인 정의’의 얼굴이다.

그러나 〈시카리오〉는 이 시점을 미끼처럼 사용한다. 영화는 케이트를 통해 관객을 이 세계로 끌어들인 뒤, 그녀의 무력함을 집요하게 증명한다.

마약과의 전쟁은 이미 전쟁의 형식을 잃었다. 승리 조건도, 종료 시점도 없다. 국가는 개입하지만 책임지지 않고, 법은 존재하지만 선택적으로만 적용된다.

이 세계에서 질서는 유지되지 않는다. 다만 더 강력한 폭력에 의해 잠시 고정될 뿐이다. 오늘의 안정은 내일의 폭력 위에 세워진다.

회의실에서 논의되는 작전은 합법의 언어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 실행되는 행위는 언제나 그 경계를 넘는다. 서류는 면죄부일 뿐이다.

케이트는 질문을 던진다. 작전의 목적이 무엇인지, 법적 근거가 무엇인지, 민간인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되는지 묻는다.

그러나 질문은 곧 침묵으로 돌아온다. 이 세계에서 질문은 무능함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시카리오〉는 여기서 분명히 말한다. 정의는 속도를 늦추고, 속도를 늦추는 것은 실패로 간주된다고.

그래서 질서는 정의의 결과가 아니라, 효율의 부산물로 존재한다. 가장 빠르고 잔혹한 방식이 곧 질서가 된다.

케이트는 이 구조에 편입되지 못한다. 그녀는 시스템의 내부에 있으면서도, 끝내 내부자가 되지 못한다.

 

폭력

〈시카리오〉에서 폭력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이자 절차이며, 문제 해결 방식이다.

이 영화의 폭력은 과장되지 않는다. 음악은 최소화되고, 카메라는 거리감을 유지한다. 바로 이 무표정함이 폭력의 본질을 드러낸다.

사람이 죽는 장면조차 사건처럼 처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업무의 일부다.

알레한드로는 이 폭력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개인적인 복수를 품고 있지만, 동시에 국가 권력의 묵인을 받은 존재다.

그는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 그는 결과만을 만든다. 그리고 이 세계는 결과를 만드는 자를 필요로 한다.

〈시카리오〉는 폭력이 어떻게 합리화되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더 큰 악을 제거하기 위해, 더 큰 폭력이 허용된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언제나 설득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당장의 효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효과는 언제나 새로운 폭력을 낳는다. 구조는 바뀌지 않고, 방법만 더 잔인해진다.

케이트는 이 폭력에 저항하려 하지만, 그 저항은 즉각적으로 무력화된다. 그녀의 윤리는 작전의 리스크로 취급된다.

이 영화에서 폭력은 선택지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 그 자체다. 폭력을 거부하는 자는 구조에서 배제된다.

〈시카리오〉의 가장 큰 공포는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폭력이 너무 쉽게 승인되고 정상화되는 과정에 있다.

관객은 어느 순간 이 폭력에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관객을 공범으로 만든다.

 

무력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케이트는 점점 투명한 존재가 된다. 그녀는 작전의 핵심에서 배제되고, 형식적인 절차만 담당하게 된다.

이 과정은 단순한 좌절이 아니다. 그것은 정의로운 개인이 이 구조에서 어떤 위치로 밀려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케이트는 끝까지 서명하지 않으려 하지만, 총구 앞에서 그 선택은 의미를 잃는다.

〈시카리오〉는 이 장면에서 정의의 최종 상태를 보여준다. 정의는 설득되지 않고, 강요된다.

알레한드로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그는 결과를 만들었고, 시스템은 그를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로 한다.

케이트 역시 살아남지만,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한다. 그녀의 생존은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방관의 상태다.

이 영화는 명확한 결론을 제시한다. 이 세계에서 정의는 선택지가 아니다. 구조 밖에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자들이 권력을 쥔다.

〈시카리오〉는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을 끝까지 드러낸다.

선한 의지는 구조를 바꾸지 못하며, 때로는 가장 먼저 소모된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 영화는 불편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이 작품의 가장 정직한 태도다.

〈시카리오〉는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묻는다. 이 세계를 유지하는 데 우리는 얼마나 깊이 연루되어 있는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