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무르 (시간, 돌봄, 사랑)

아무르, 사랑이 끝까지 남는다는 말이 가장 잔인해지는 순간에 대하여
아무르는 제목만 보면 사랑을 다룬 영화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이 보여주는 사랑은 우리가 기대하는 형태와는 정반대에 가깝다. 이 영화에는 설렘도, 낭만도, 감정을 고조시키는 음악도 없다. 대신 늙어가는 몸, 무너지는 존엄,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의 고통이 있다. 〈아무르〉는 사랑을 감정의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선택이며 책임이고, 때로는 잔인한 결단이다. 노년의 부부 조르주와 안느는 더 이상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는 오직 현재의 지속과 끝을 향한 시간만이 남아 있다. 이 영화는 묻는다. 사랑이란 끝까지 함께 견디는 것인가, 아니면 더 이상 견디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것인가. 그리고 그 질문을 관객의 손에 그대로 남긴 채 물러난다.
시간
〈아무르〉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의 공간에서 시작한다. 봉인된 아파트, 고요한 거실, 정리된 물건들은 이 영화가 회복이나 변화의 이야기가 아님을 처음부터 선언한다. 이곳에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흐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조르주와 안느는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부부다. 그들의 관계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랑은 대사로 표현되지 않고, 습관과 태도로만 드러난다. 이 침묵은 관계의 깊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다가올 고통의 무게를 예고한다.
안느가 갑작스럽게 쓰러지는 순간에도 영화는 과장하지 않는다. 음악은 흐르지 않고, 카메라는 멀리서 이 장면을 바라본다. 병은 이렇게 아무 예고 없이 삶에 들어온다.
시간은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존재다. 하루는 어제와 다르지 않지만, 몸은 분명히 달라진다. 회복은 없고, 오직 악화만이 반복된다.
안느의 병은 단순한 신체의 쇠퇴가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의 붕괴다. 그녀는 피아니스트였고, 교육자였으며, 스스로를 표현할 언어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병은 그 언어를 하나씩 지워간다.
말이 어눌해지고, 기억이 어긋나며, 의지는 약해진다. 안느는 자신이 점점 자신이 아니게 되는 과정을 인식한다. 이 인식이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조르주는 이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다. 그는 시간을 되돌릴 수도, 멈출 수도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연시키는 일뿐이다.
〈아무르〉에서 시간은 치유의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상실을 반복해서 확인시키는 장치다. 매일 조금씩 더 많은 것이 사라진다.
이 영화는 말한다. 어떤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지만, 그 깊이가 반드시 아름답지는 않다고.
돌봄
안느의 병이 진행되면서, 조르주의 사랑은 돌봄으로 전환된다. 이 변화는 점진적이지만, 되돌릴 수 없다.
돌봄은 이 영화에서 숭고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반복적이고, 지치며, 때로는 혐오감을 동반한다.
조르주는 안느의 식사를 돕고, 몸을 씻기고, 배설을 처리한다. 이 과정에서 존엄은 끊임없이 시험받는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한다.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무너지는가.
조르주는 요양원을 거부한다. 그는 안느와의 약속을 지킨다.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약속, 낯선 곳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약속.
그러나 이 약속은 점점 그를 고립시킨다. 집은 병실이 되고, 삶은 관리가 된다.
조르주의 분노는 이기심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이다.
그는 지치고, 좌절하며, 때로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 순간들에서 〈아무르〉는 돌봄의 어두운 면을 숨기지 않는다.
안느는 자신의 상태를 분명히 인식한다. 그녀는 조르주에게 말한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이 장면은 이 영화를 가장 불편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끝내는 것이 사랑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관객을 세운다.
돌봄은 여기서 윤리의 문제가 된다. 보호와 폭력, 헌신과 강요의 경계는 어디인가.
조르주는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옳아서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놓였을 뿐이다.
사랑
〈아무르〉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만 남는다.
조르주는 안느를 위해 살아왔고, 이제는 안느를 위해 끝을 선택해야 하는 위치에 선다.
이 영화는 이 선택을 설명하지 않는다. 미화하지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함께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게 해주는 것인가.
이 영화의 결말은 충격적이지만 선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조용하고, 필연처럼 다가온다.
조르주의 선택 이후에도 시간은 흐른다. 삶은 계속되지만, 사랑은 다른 형태로 남는다.
〈아무르〉는 죽음을 결말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의 정의를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로 제시한다.
이 영화는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존중한다. 쉽게 말할 수 없는 선택과 그 무게를.
사랑이 반드시 아름답게 끝나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아무르〉는 보고 나면 오래 남는다.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질문을 마음속에 남긴 채 관객을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사랑은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