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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호텔 르완다 (중립, 남은 사람, 결정의 무게)

lhs2771 2025. 12. 25. 14:31

호텔 르완다 영화 속 한 장면

 

호텔 르완다, 모두가 떠나도 남아 있었던 한 인간의 선택이 남긴 질문

호텔 르완다는 1994년 르완다 집단학살이라는 현실 속에서, 국제 사회가 철수하고 세계가 침묵하던 순간에 한 호텔 지배인이 수천 명의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학살의 잔혹함을 자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던 세계,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던 질서가 얼마나 많은 죽음을 가능하게 했는지를 차분하지만 냉정하게 드러낸다. 〈호텔 르완다〉는 영웅을 만들기보다, “나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묻는 영화다. 이 작품이 끝난 뒤 남는 것은 감동보다 책임이며, 연민보다 불편한 질문이다.

중립이라는 이름의 안전

폴 루세사 바기나는 처음부터 정의를 외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정치적 투사도, 혁명가도 아니다. 그는 호텔 지배인이다. 손님을 응대하고, 문제를 조정하며, 갈등을 최소화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자 삶의 방식이다.

폴의 삶은 ‘중립’ 위에 세워져 있다. 그는 후 투족이지만 투치족 아내를 두고 있고, 정치적 발언을 피하며, 군인과 외교관을 모두 고객으로 대한다. 이 중립은 도덕적 선택이라기보다 생존 전략이다.

영화 초반의 폴은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인물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 말은 비겁함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 사회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태도처럼 보인다.

〈호텔 르완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중립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인가, 아니면 이미 기존의 권력과 폭력에 기여하는 태도인가.

학살은 하루아침에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선동, 분류, 혐오의 결과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중립’은 가장 편안한 자리였다.

폴 역시 처음에는 사태를 ‘관리’하려 한다. 폭력을 줄이고, 질서를 유지하고, 호텔이라는 공간 안에서만큼은 평온을 지키려 한다. 그는 시스템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곧 한계에 부딪힌다. 질서는 보호하지 않는다. 중립은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폭력이 더 깊숙이 파고들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

이 영화는 묻는다. 우리가 믿어온 중립은 과연 누구를 보호해 왔는지를. 그리고 그 중립은 언제부터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서 있었는지를.

 

떠나는 세계, 남겨지는 사람들

〈호텔 르완다〉에서 가장 잔혹한 장면은 총성이 울리는 순간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 사회가 철수하는 장면이다.

외국인들은 구조된다. 백인, 외교관, 기자들은 비행기에 오른다. 그 과정은 질서 정연하고 조용하다. 그리고 그 질서 속에서 수많은 르완다인은 남겨진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분노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차분하게 보여준다. 누구의 생명이 ‘구조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는지를.

유엔군은 존재하지만 개입하지 않는다. 명령이 없기 때문이다. 국제 사회는 학살을 ‘내전’으로 규정하고, 중재의 대상으로만 취급한다.

이 모든 설명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변명이다. 〈호텔 르완다〉는 이 변명의 언어를 해체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문장은 얼마나 많은 죽음을 정당화해 왔는가.

폴은 이 순간을 통해 깨닫는다. 세계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의는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깨달음은 영웅적인 각성이 아니다. 그것은 절망에 가깝다. 더 이상 기대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묻는다. 방관은 정말 선택이 아닌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는 정말 책임이 없는가.

〈호텔 르완다〉는 집단학살을 가능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이 증오만이 아니라, 세계의 무관심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남겠다는 결정의 무게

폴이 한 선택은 단순하다. 떠나지 않는 것. 그리고 문을 닫지 않는 것.

그는 총을 들지 않는다. 대신 전화기를 들고, 술을 건네고, 뇌물을 쓰며, 인간관계를 활용한다. 그의 무기는 일상의 기술들이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구원이 숭고한 희생으로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폴은 두렵고, 계산적이며, 때로는 자기중심적이다.

그는 가족을 먼저 생각한다. 안전이 보장된다면 떠나고 싶어 한다. 이 모습은 영웅적이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 비영웅성이 이 영화를 진실하게 만든다.

폴은 완벽해서 남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호텔 안에 모인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 공포는 하루도, 한 시간도 멈추지 않는다. 폴은 이 공포를 함께 견딘다.

영화의 마지막, 살아남은 사람들은 구조되지만, 구원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살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폴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영웅으로 기억되지만, 그 기억은 무겁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죄책감이 되기 때문이다.

〈호텔 르완다〉는 말한다. 인간의 존엄은 위대한 선언으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그것은 남겠다는 선택, 외면하지 않겠다는 태도 속에서 겨우 유지된다고.

이 영화가 끝난 뒤 남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무겁다. 우리는 지금, 정말 중립적인 자리에 서 있는가. 아니면 가장 안전한 방관의 자리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