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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어댑테이션 (정체성, 각색, 욕망) 어댑테이션, 이야기를 쓰는 순간 인간은 왜 반드시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가 어댑테이션은 각색 영화라는 외형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창작이라는 행위 자체를 해부대 위에 올려놓은 자전적 고백에 가깝다. 이 영화는 ‘원작을 충실히 옮기고 싶다’는 윤리적 욕망과 ‘이야기는 결국 이야기답게 흘러가야 한다’는 산업적 현실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기는 한 인간의 내면을 그대로 노출한다. 〈어댑테이션〉은 각색에 성공하는 법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각색이 왜 본질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에만 비로소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역설을 증명한다. 이 작품은 묻는다. 창작자는 어디까지 정직해야 하는가. 관객을 만족시키는 선택은 배신인가, 아니면 또 다른 진실인가. 그리고 결국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의 .. 2026. 1. 2.
리뷰] 에너미 (분열, 권력, 공포) 에너미,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세계는 괴물이 된다 에너미는 도플갱어라는 익숙한 장치를 사용하지만, 그 목적은 정체성의 미스터리를 푸는 데 있지 않다. 이 영화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조차 허락하지 않는 세계를 보여준다. 〈에너미〉에서 인물은 자신을 이해하려는 순간 더 깊은 혼란에 빠지고, 현실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공포로 되돌아온다. 이 작품은 명확한 설명을 거부하며, 관객에게 불안정한 감각만을 남긴다. 그러나 그 불안은 공허하지 않다. 그것은 현대인이 자기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역할의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에너미〉는 묻는다. 우리는 정말 하나의 자아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분열된 상태를 정상이라 부르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영화는 그.. 2026. 1. 1.
리뷰] 카포티 (관찰, 착취, 붕괴) 카포티, 위대한 문장이 완성된 자리에서 인간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카포티는 전기 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예술이 인간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가’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불편한 기록에 가깝다. 이 작품은 트루먼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를 집필하는 과정을 따라가지만, 그 여정은 결코 창작의 승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한 권의 위대한 논픽션이 탄생하기까지 요구된 윤리적 포기와 감정적 착취, 그리고 그 결과로 남겨진 공허를 집요하게 응시한다. 〈카포티〉는 묻는다. 작가는 타인의 삶을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는가. 공감은 언제 관찰로, 관찰은 언제 착취로 변하는가. 그리고 예술의 진실성은 타인의 파멸을 대가로 삼을 때에도 여전히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그 질문을 끝내 회피.. 2026. 1. 1.
리뷰] 헤어질 결심 (시선, 윤리, 결심) 헤어질 결심, 사랑이 윤리를 통과할 때 남는 것은 무엇인가 헤어질 결심은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사랑이 인간을 어디까지 흔들 수 있는지에 대한 영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흔한 멜로드라마처럼 감정의 고조로 사랑을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절제하고, 거리를 유지하며, 침묵과 시선을 통해 사랑을 드러낸다. 〈헤어질 결심〉에서 사랑은 고백되지 않고, 확신되지 않으며, 끝내 완성되지도 않는다. 대신 이 영화는 묻는다. 사랑이란 과연 상대를 소유하는 감정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무너뜨리면서까지 지키려는 태도인가. 그리고 그 질문을 범죄와 윤리, 책임과 침묵이라는 복잡한 구조 속에 배치한다. 이 작품은 사랑을 말하지만, 결코 사랑에 취하지 않는다. 그것이 〈헤어질 결심〉이 남기는 가장 .. 2026. 1. 1.
리뷰] 더 파더 (붕괴, 관계, 존재) 더 파더, 기억이 무너진 자리에 남은 인간이라는 질문 더 파더는 치매를 다룬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질병을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대신 관객을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의 시점’ 안으로 밀어 넣는다. 〈더 파더〉는 치매를 관찰의 대상으로 두지 않고, 체험의 상태로 전환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증상이 아니라 감각이다. 무엇이 사실인지, 누가 진짜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 〈더 파더〉는 이 불안정한 감각을 이야기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의 구조 자체를 무너뜨린다. 공간은 뒤섞이고, 인물은 바뀌며, 시간은 반복된다. 이 모든 혼란은 연출의 기교가 아니라, 기억이 붕괴되는 인간의 내부 풍경이다. 이 영화는 묻는다. 기억이 사라지면 인간은 무엇으로.. 2026. 1. 1.
리뷰] 바벨 (단절, 언어, 연결) 바벨, 모두가 연결된 시대에 인간은 왜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가 바벨은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교차 편집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연결된 세계가 어떻게 인간을 더 고립시키는가’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오해에서 비롯된 비극을 감정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 오해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증폭되고, 권력과 언어의 불균형 속에서 왜곡되며, 결국 개인의 삶을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밀어내는지를 차갑게 관찰한다. 총 한 발로 시작된 사건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의 축소판이다. 〈바벨〉은 묻는다. 우리는 정말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단지 같은 시스템 안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고립되어 있을 뿐인가. 이 영화는 이해의 실패를 개인의 한계로 돌리지 않는다. .. 2026. 1. 1.